5번째 타임로그 |1953.07.13

금성 전투 (~7/20)

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 때, 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중공군과 국군이 치른 전투이다. 7•13 공세라고도 한다.

당시 중공군은 한국 전쟁에서 그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중부전선에 돌출되어 있는 한국군 전선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중공군 4개 군 산하 12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의 돌출부에 대한 최후공세를 감행했다.

국군 5개 사단은 7월 13일에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금성 돌출부의 양견부가 돌파되었으며, 뒤이어 후방의 지휘소(수도사단)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는 등 혼란이 야기됨으로써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이같은 공세 가운데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저지 시켰다.

중공군은 초반의 선제 공격에 성공했으나 5사단을 주축으로 한 국군 제2군단의 끈질긴 저지, 공세초반과 공세후 국군의 저지로 인한 병력 손실, 그리고 폭우로 인한 보급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재정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7월 16일부터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김종묵 소대장의 활약을 앞세운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 탈환하였으나, 더 많은 희생을 우려한 미 제8군 지휘부의 명령으로 인해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다.

국군은 1,701 명의 전사자와 7,5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외에 4,136명이 사로잡히거나 실종되었다.
(실종자의 대부분 포로가 되어 현재까지 북한에 억류).

한편 중공군은 27,216명이 전사하고 38,700명이 부상당했으며, 186명이 포로가 되었고 1,428점의 무기를 노획당했다. 국군은 공세 초반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사로잡히고(결국 휴전 후 포로교환당시 송환되었다.), 지원을 나온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의 손실을 입었고 아이슬랜드 선 전방의 전 전방의 전초선만을 확보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게 되었다.

중공군은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초반의 기습으로 승기를 잡은 전투였으나 16일을 기해 전열을 복구한 국군에게 역습을 당한 점,
백암산과 적근산부근에서 국군 제2군단에게 저지당한 점, 점령지의 절반이었던 간진현-금성천-462고지를 다시 빼앗긴 점, 그리고 국군에 비해 2~3배가 우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6만6천여명의 인명피해(국군에 비해 3~4배)가 발생한 점으로 보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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